올 여름 성수기에 개봉한 <에셔>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 인페이머스는 R등급과 소포모어 징크스의 제약에도 월드와이드 오프닝 7억달러를 기록하며 대흥행하는 중이었고 절대 대중 앞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원작자 파딜 콕스에 대한 궁금증도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빨리 시리즈의 다음 편을 써 달라는 팬들의 요구는 파딜 콕스와의 유일한 소통창구인 출판사로 쏟아졌고, 출판사는 "파딜과 상의한 끝에 올해가 가기 전에 <에셔>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고 발표해 버렸다.
그리고 올해를 30일 남긴 현재, 파딜 콕스라는 필명을 쓰는 소설가이자 라이칸스롭 아즐라는, 3일 안에 사람-아니 라이칸스롭-이 제로베이스에서 300페이지의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편집자와 토론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슬럼프라고 발표하자."
"하루 더 줄게요. 지난 편이 투샤샤에서 끝났으니까 거기까지 쳐들어온 뱀파이어 사냥꾼들에게 준이 습격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게 어때요? 스케일도 키울 겸 사냥꾼들의 상단부도 넣고..."
"...150페이지 외전 정도라면 나흘 동안 어떻게 쓸 수 있을 것 같아. 준보다는 게가 인기가 많고 요즘 여자 주인공이 대세니까.."
"150페이지로는 판타지 소설책 한 권이 안 나와요, 에이즐라."
"아즐라라고..."
5년째 자신의 이름을 형편없이 부르는 요하닌이지만 그래도 입은 무거운 인간이다. 얼굴없는 작가 파딜의 정체가 어떤 경로로든 밝혀진다면 모든 출판권 계약을 파기할 것을 조건으로 걸어두었으나 이런 정보화 세상에서 그만큼이나 자신을 철저히 숨겨주는 출판사는 귀한 것임을 아즐라도 안다. 그래서 웬만하면 출판사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너무나도 무리한 계획이었다. 프로듀서와 입씨름할 시간에 한 글자라도 써 보자고 결심한 아즐라는 입을 다물고 블루투스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올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에셔>는 시작한 지 20년이 넘은 소설이다. 지난 5부작을 완결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잘 마무리했으니 3년 만에 새 챕터를 시작한다면 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화려한 컴백이 필요했다. 촉박한 시간에 몰려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부분에 생각이 미치자 아즐라는 약간 오기가 생겨 휴대폰을 들었다.
"뭐 해요?"
아즐라는 요하닌의 질문에 대꾸없이 책꽂이에서 낡고 두꺼운 공책을 하나 꺼내오더니 한참 뒤져 번호 하나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에서는 벨이 몇 번 울리지 않고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나야. 아즐라. 있잖아, 내가 책을 쓰고 있는데 말야. 네 얘기를 소재로 써도 될까? 그, 네가..." 아즐라는 프로듀서를 한번 돌아보고 얼버무리듯 속삭여 말했다. "...였던 얘기. 써도 된다 하면 메시지 듣고 최대한 빨리 연락 줘. 40-210..."
"누군데요?"
"이 얘기를 쓰도록 허락받으면 에셔 6부가 다음 주부터 인쇄되는 거고, 아니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은퇴하는 거야."
"뭐라고요? 대체 무슨 얘긴데요? 저랑도 상의해야 할 것 아니에요!"
"기다려 봐. 한 시간 내로 가타부타 전화가 올 거야."
요하닌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에이즐라를 찾는 것 같아 아즐라는 무시하며 한 시간 후에 지워질지도 모를 초안을 적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