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ancholy w. 리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찜통일 필요가 있나. 이상기후니 뭐니 엘리야에게는 더위의 이유보다는, 더위를 없앨 방법이 더 중요했다. 하필 이 더운 날에 에어컨이 말썽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비라도 오면 좋을 텐데, 야속하게도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문 너머의 풍경은 물기 없이 찌기만 했다. 지금 밖의 날씨는 익사해 죽기에 딱일까. 엘리야는 한참이나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소파 위에 녹아있나 싶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그래봤자 크게 현명한 생각은 아니겠지만.) 온힘을 다해 벌떡 일어났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부엌으로 향한다. 태양을 담은 듯 새빨갛게 빛나는 눈동자에 희망 비슷한 게 담기는 것도 같다.

엘리야는 손을 뻗어, 냉장고 문을 활짝 열었다(고민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냉장식품마냥 찬바람을 한껏 맛보려는 심산이었다. 이것저것 먹을 만한 게 많이 들었지만 그는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리를 굽혀 쪼그려 앉았다. 열어놓은 냉장고의 안쪽에서부터 평소엔 음식을 차갑게 하는 용도의 냉기가 솔솔 불어와 엘리야의 땀 흘린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는,

‘진작 이렇게 할 걸.’

그제야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애처럼 실실 미소 지었다. 이럴 바에야 냉장식품으로 태어나서, 냉장고 안에 들어가고 말지. 눈을 감은 동안 검은 시야에, 이따금씩 주홍의 빛이 선연했다. 옷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와 함께 갑작스레 그의 목을 죄는 익숙한 감정. 우울이라는 것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문득문득, 사진을 찍어 기록해둔 것처럼 선명한 몇 가지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는 저도 모르는 새에 웃던 입꼬리를 축 내린 채 눈을 감고 넋을 놓은 꼴이 되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걸거야…….

엘리야는 결국 눈을 떠, 딱히 얼굴이랄 게 없는 음식들과 빤히 마주보고 앉아 있기로 했다. 무언가 시야에 담으면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시 그러고 있자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는 계속 냉장고 앞에 버티고 앉아있었다. 얇은 티셔츠와 바지 안쪽으로 냉기가 닿았고, 붉은 눈동자는 끊임없이 생기 없는 냉장식품들과 눈을 맞췄다. 서리처럼 시야를 방해하는 옛 기억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모양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엘리야의 시야에 레이가의 얼굴이 담겼다(그래. 저 얼굴이야. 저 얼굴을 보니까 조금, 괜찮아진 것도 같아.). 담배 하나를 문 채로 빤히 하는 행동을 내려다보는 그에게 엘리야가 방긋 웃어 보인다. 약간의 균열이 엿보이는, 레이가에게는 꽤 익숙한 표정이었다. 레이가는 잠시간 눈만 깜빡이며 그를 내려다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엘리야, 거기서 뭐하는 거야.”
“시원해서. 내 집에서 오늘은 여기가 제일 시원한 거 같아, 레이가. 에어컨 언제 고쳐져?”
“내 집이 왜 네 집이야. 자, 이거.”

레이가는 손에 쥐었던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쇼핑백 중앙의 로고를 알아본 후에야 엘리야가 몸을 일으켜, 그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가는 열려 있는 냉장고 문을 먼저 닫았고 (언제부터 열어놓은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엘리야에게는, 손에 들고 있던 배스킨라빈스 쇼핑백을 넘겨주었다.

“아이스크림이네.”

엘리야는 쇼핑백에 들어있던 걸 주섬주섬 꺼냈으나 아이스크림보다도 함께 들어있던 드라이아이스에 눈길을 주었다. 화상을 입지 않게 조심스레 포장의 끝을 잡아 들어 올린 후 레이가와 눈이 마주친다. 이전에 약속이라도 해 둔 것처럼 레이가가 찬장을 열어 유리 볼을 꺼내자 엘리야가 포장을 뜯어 드라이아이스를 유리볼 안으로 굴려 넣었다. 물을 조금 넣고 나면, 천천히 유리볼을 가득 채우더니 테이블 위로 넘쳐흐르는 새하얀 냉기. 이럴 땐 둘 다 어린아이나 다름없이 그걸 가만 쳐다보고 있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에는 각자 아이스크림통 뚜껑을 열거나, 얼려두었던 술병을 꺼내 끌어안는 것으로 더위를 쫓아내려 한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 테이블 위로 레이가가 찬 술병을 끌어안고 엎어지자 엘리야는 그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툭 말을 꺼내 던졌다. 애플민트? 민트 들어간 건 싫어.

“기껏 이것저것 생각해서 사왔더니 말이 많군.”
“민트는 별로니까.”
“입 다물고 먹어, 그냥.”

굽히지 않는 레이가에게 엘리야는, 입 다물고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먹냐고 톡 쏘아붙였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보고, 그거 좀 끄란 소리도 잊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떠 입에 넣고 나서야 좀 조용해졌는데, 레이가는 여전히 술병을 끌어안은 채 테이블 위로 늘어지기만 했다. 붉은 눈동자는, 레이가의 밤 담은 머리칼을 한껏 새긴다.

엘리야는 언제부턴가 레이가의 블루블랙 머리칼이 좋았다. 새카맣게 아무것도 담지 않을 것만 같은 눈동자도 좋았고. 길게 기른 머리를 집에 와서는 가볍게 묶고 다니는 모습도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그러나 그의 감정이 단순히 레이가의 외모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 자신은 정확히 알고 있다. 그저 그가 하는 말이면, 그가 던지는 눈짓이면, 그가 뻗는 손길이면 엘리야에게 레이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러니까, 아무 때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우울의 감정이 이따금씩 그에 의해 사르르 사라지기도 했다. 레이가가 딱히 무언가를 해주기 때문은 절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애플민트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고, 그것이 온전히 녹아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고 조용하던 그의 입술이 점차 움직여 괜히 투정을 부렸다.

“역시 민트는 싫어.”

드라이아이스의 냉기가 레이가의 머리칼 사이사이로 흘러들어갔고, 눈꺼풀을 올려 엘리야를 노려보는 검정의 눈동자. 다음엔 안 사줄 줄 알아. 빈말을 툭 던지곤 도로 눈을 감아버리려니 엘리야는 또 익숙한 듯 말을 받아쳤다. 그 다음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며 레이가가 몸을 일으키며 뱉어내는 말. 몸이 좀 시원해졌으니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까지, 실컷 싸울 게 분명하다. 그들은 서로가 뻔히 알면서도 절대 지고 들어가지는 않는 자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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