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회식이 많았다. 수능도 끝나서 개인 과외 일도 줄었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트로포스였다. 한국 분위기에 물들었는지 새벽까지 술을 퍼마신 외국인 어학강사 동료들을 택시 태워 보내놓고 집에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일어나 보니 라면 냄새가 났다. 트리스탄이 불어터진 컵라면을 내밀었다. 일어나기 삼십분 쯤 전에 말아놓은 것 같다. 정성을 생각해서 국물만 마셨다. 없는 정신에 둘러보니 뭔가 하나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트, 녹티스는?"
"마미, 삼틀 없었어."
트리스탄이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어 내밀며 말했다. 대충 사흘동안 집에 안 왔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 집에 안 들어오나 싶더니만. 애가 말하는 거니까 오늘이 나흘째라는 건데 하루정도 외박한 적은 많아도 이렇게나 오래 안 들어온 건 없던 일이었다. 이 철없는 뱀파이어 귀족님의 문제는 잘은 몰라도 같은 뱀파이어들한테 죽기살기로 쫓기면서도 어딜 나갈때 말도 없이 나간다는 것이다. 무시할 수도 없게 자신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와 놓고, 그렇다고 죽고싶은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어딜 간다 언제 온다 이야기도 하지 않고 나돌아다니면 걱정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걱정한 기색이 없으면 서운해하면서 쪼아 대는 주제에 걱정을 하게 할 거면 이러질 말란 말이야.
"....이 관심암 말기 환자가."
어쩔 수 없이 트로포스는 트리스탄을 데리고 어디서 뱀파이어들에게 붙잡혀서 비명횡사하지는 않았기를 바라며 말썽꾼 뱀파이어를 찾아나섰다. 사흘 전의 냄새라 남아있을지 걱정했는데, 뱀파이어는 특유의 체향이 강하고 오래 가는 듯 꽤 멀리까지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버스정류장 앞에서 냄새가 끊긴 것을 보니 또 아무 버스나 타고는 정신을 놓고 어디 끝까지 가버린 모양이다. 이러면 아무리 트로포스가 마약탐지견 뺨치는 후각이래도, 뱀파이어 체향이 아무리 강하대도 소용없는 일이다.
행동 패턴은 끝장나게 단순한데 그걸 혼자 추적하는 입장에선 속터지기가 테러당한 기분이지, 트로포스는 별 기대 없이 핸드폰 위치 추적 어플을 켜 녹티스의 번호를 입력해 보았다. 4일이나 되었으면 어디서 충전하지 않은 이상은 핸드폰을 쓰지 않았대도 꺼졌을 시간인데. 그동안 어디까지 더 갔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마지막에 어디 있었는지는 알 수 있겠지. 여기가 미국나 중국이 아니길 다행이다. 검색후 나온 결과는 부산이란다. 아무리 트로포스가 이방인이라지만 부산이 어딘지는 알고 있다. 그 정도는 매일 뉴스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러니까 부산이. 그렇단 말이지. 알고 있다니까. 아, 젠장.
길치는 관심병의 합병증인가? 그러니까 도대체 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타고 얼마나 걸리는지도 모를 곳까지 가서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헤매는 짓을 반복하는 건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타향 땅에서 답답한 건 알겠는데 누가 너를 죽이니 살리니 하는 판에는 좀 자제해 달라니까. 그러면서 부산에 가 있다니 그 재주가 가상하다. 트로포스는 역으로 가서 가장 빨리 오는 부산행 KTX 편도를 끊었다. 차안에서 나오는 군것질거리들을 조르는 트리스탄에게 감자칩 한봉지를 먹이고는 마법을 써서 재우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숙취를 안고 뛰어다녔더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부산에 도착은 했지만 기차에서 내리니 참 막막했다. 마지막으로 신호가 끊긴 지점으로 가서 이리저리 탐문수사를 벌이는데 별 소득은 없었다. 그러게 이 넓은 도시에서 어디 있는 줄 알고.
"며칠 전에 이 근처에서 검은 머리에 얼굴 창백하고 저처럼 얼굴에 흉터도 있는 외국인 보신 적 있으세요? 까만 코트를 입었는데.."
"외국인 총각이 우찌 이리 한국말도 잘하노. 아가야 니도 오뎅하나 무그라."
"...."
어려이 더듬어 자취를 찾아간 곳은 항구였다. 배를 탔냐, 버스 타듯이 아무 배나 탔더냐. 제기랄. 원양 어선이나 타고 태평양으로 나가 버려. 밤이 늦도록 물어물어 다녔지만 아무도 배를 탄 녹티스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트로포스는 오뎅을 마음에 들어하는 트리스탄에게 오뎅을 먹이며 포장마차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속만 썩이면서 내 아까운 피나 빨아먹는 뱀파이어 찾겠답시고 여기까지 와서 무슨 생삽질이람. 며칠 동안 피 안 빨리니 그건 좋네, 포기하고 돌아가야겠다, 술이나 마셔야지 하며 소주를 주문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발신번호를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아마도 공중 전화 번호인 듯했다.
"여보세요."
[트로비.]
트로포스는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입을 막았다. 그래, 트로포스, 넌 영국 신사야.
"어딥니까."
[여기가..김포.]
"부산에 있는 줄 알았는데요."
[아, 부산에 갔다가..돌아오는 길을 모르겠어서, 비행기를 탔어.]
"부산까지는 왜 갔어요."
[사실 가려고 간 게 아닌데...돌아가는 버스를 타려다가, 그만.]
"Bloody hell."
기어이 욕설을 뇌까린 트로포스가 뜨거워진 이마를 문질렀다. 그토록 걱정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녹티스에게 화도 나지만, 연락을 걸어온 그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한다. 이 얄미운 뱀파이어 같으니라고.
"집에 가 있어요. 비밀번호는 4038요."
[..데리러 와 줘, 나 돈도 없고 길도 모르겠어.]
"형, 여기 부산이에요. 형 찾고 있었어요. 우리 이제 갈 거니까, 그 정도는 알아서 해요."
[기다릴께. 아무데도 안 가고 있을 테니까.]
트로포스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고 트리스탄을 데리고 일어났다. 가서 화 내줘야지.
"트, 집에 가자."
"마미? 노티쯔 마미 찾았어?"
"응,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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