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2015-Jan
Canaan작성자: webmaster 조회 수: 141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미지와 달리 악마는 단정한 미인이었다. 훤칠한 키와 몸매에 잘 입은 고급 수트까지 더하면 누구나 단숨에 호감을 가질 만한 인물이었다. 물론 매우 악마답게 생긴 악마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본디 천사로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는 사람을 타락시키는 데는 타고난 제 외견이 꽤 먹혀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수완 좋은 악마였다. 돈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악마는 돈과 내기를 좋아한다. 악마에겐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지만 내기에 기적을 쓰는 것은 그의 정책이 아니었다. 악마는 오로지 자신의 감만 가지고 도박을 했다. 기적은 그 말고도 지치도록 쓸 곳이 많았다. 몇천 년을 닳고 닳은 악마를 도박으로 이길 만한 인간은 많지도 않았다. 자신은 원래 이런 악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을까? 악마는 쌓아 둔 돈으로 도박장들을 세웠고 그가 타락시키는 사람은 끝도 없이 늘어갔다. 악마는 자기 발로 찾아와 수렁에 빠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굳이 자기가 건드리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 타락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자신도 이미 천국을 버리고 나와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악마이긴 하지만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 희망을 버리고 여기에서 모든 것을 내던지는가? 악마는 희망이나 사랑을 그리 믿지 않았다. 상대의 사랑 받는 것은 좋아했지만 자신의 사랑은 믿지 못했다. 그것은 예쁘긴 하지만 빛나는 사람은 너무나 빨리 죽어버린다. 상처받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어느 순간 악마는 먼저 그것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뭔가 좀 다르다. 상대가 천사인 것이다. 악마는 여자를 좋아했었다. 길고 긴 삶에서 남자와 사랑해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주 오래 이 예쁜 것을 나눌 수 있는데, 천사가 남자인 것은 별로 큰 문제는 아니다. 당신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그 때도 알았다면, 나는 성급하게 타천하지 않았을까. 삼십 대 중후반의 몸, 체구는 자신보다 작아 한 품에 들어온다. 항상 웃는 표정 때문에 눈가와 입가엔 웃음 주름이 있다. 그것은 천사의 얼굴을 보다 나이들어보이게 만들었지만 악마는 그마저 좋았다. 부숭하지만 입맞춰 보면 의외로 꺼끌하지 않은 수염도 사랑스럽다. 동공이 희게 빛나는 새까만 눈동자가 악마를 바라본다. 사랑해요, 로렌조 씨. 간혹 자신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혼자 새빨개지는 뺨이 또다시 여느 때보다 달아 있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간다. 아, 난 당신을 너무 좋아해.
댓글 '5'

webmaster
천사 연인은 목에 교살 자국을 달고 그것을 꼭꼭 가리고 다녔다. 날개는 가시 철조망이었다. 자신의 날개 녹은 흔적도 악마가 원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되 애초에 그들의 몸에 상흔이 남는다는 절대 흔하지 않은 일이 무슨 연유인지 궁금해 묻고 싶었지만, 악마는 혀끝까지 올라온 물음을 매번 삼켰다. 연인이 저더러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수치스러운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신도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저희에게 남은 날이란 성전 중에 소멸되지 않는다면 영원일 수도 있는 일이다. 하찮은 호기심 충족으로 행복을 깨기에는 앞으로가 너무나 아깝다. 그저 안타까운 것은, 날카로워 더 고통스러울 듯한 그 가시돋친 날개보다 수십세기 전 불타 기억도 희미해진 악마의 날개를 천사가 동정하여 쓰다듬었을 때.

webmaster
악마는 연인의 천사성을 사랑했다. 물론 천사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그의 천사됨이 좋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의 노스탤지어라고 할 순 없다. 만일 그랬다면 악마는 이미 지금껏 만난 모든 천사와 사귀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 천사도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다. 악마는 천사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가정을 천사에게 고백하던 날까지도 부정해 왔다. 뭐, 평화로운 시간이라면 오래 알아온 친구처럼 지낼 수는 있는 일이다. 그 천사가 고지식하고, 신에게 충성스럽고, 순수하며 살아 있는 모든 악마를 철천지 원수로 여겨 눈에 띄기만 하면 잡아 죽이려드는 부류만 아니라면 말이다. 천사가 다만 상냥했던 것이라면 그렇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악마 자신도 겉으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 않던가. 악마는 악마에게 그렇게도 무방비하고 호의적인 천사는 처음 보았다. 인간 사회에서 부유한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에겐 뒤끝 있고 대가를 바라는 호의가 쏟아지지만, 천사에게 다른 속내가 있을 리 없지않은가? 불확실성에 기대 다분히 충동적으로, 그러나 한참을 고민해 사랑을 고백했을 때 악마는 천사가 자신을 모욕했다며 물을 끼얹고 나가는 상황까지는 염두해 두었다. 들끓는 미묘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면 빨리 분명한 거절이라도 받고 깨끗하게 포기하자는 내심이었다. 하지만 천사는 역으로 사랑을 내보였고, 악마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으며 찰나 고백을 후회했다. 이 여물지않은 천사가 자신에게 고백한 사랑의 무게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이 악마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나는 고귀한 천사인 당신을 더럽히게 될 지도 모르는데?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악마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바야흐로 성전이 시작되려는 이 때? 하지만 악마는 동시에 자신이 천사의 사랑을 거역할 수 없으며 자신 또한 천사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울고 있는 그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webmaster
그가 인간에게 나는 악마Demon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이는 그럴 줄 알았어! 라며 멀리 도망칠 것이고 어떤 이는 질나쁜 농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도 악마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이들은 후자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악마는 호감을 가진 상대가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부러 타락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악마의 홈그라운드는 그러지 않아도 제 발로 타락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차고 넘쳤다. 악마를 아는 인간에게 악마는 하는 일은 탐탁치 않지만 됨됨이만은 성실하고 좋은 친구이며 고용주이며 동료이며 연인이었다. 마지막은 꽤 오래 전에 붙던 호칭이지만 말이다. 악마가 해야 하는 일은 다분히 천박해 보일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도 별반 다르지 않으나 그렇다고 천박함에 온 몸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악마는 인간의 고상한 일들을 좋아했다. 그들이 이룩한 것은 무너질 바벨탑일지언정 기품있고 아름답다. 악마는 신을 버렸지만 그들이 신을 찾아 찬양하는 것들은 좋아했다. 사실 인간들의 품위는 거기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쉽게 타락하지 않는 품위있는 인간을 존중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지성이 모자란 어린아이를 포함해서-에게는 가차없었다.

sad
악마는 악마됨의 증명 외에는 쓸모없게 된 지 오래인 자신의 날개를 펴보았다. 유리 같은 그것은 흡사 깃털로 된 날개처럼 의지대로 물결치지만 만져 보면 차갑고 딱딱하다. 악마는 천사가 손에 끼워준 철반지를 보았다. 제 날개를 잘라 만든 반지라 했다. 손에서 빼어 살펴보니 링 안쪽에는 천사의 이름 머릿글자가 새겨져 있다. 녹슨 듯한 붉은 빛이 희미하게 돌지만 쇠비린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악마는 간만에 꺼낸 날개를 우악스럽게 움쳐잡았다. 목적하는 일에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무의미한 날개가 간만에 의미를 찾는 일이다. 악마는 제 날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쉬이 깨질 것 같이 금이 가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악마의 신체이다. 만년필은 오히려 펜촉만 나갈 것이다. 악마는 서랍에서 편지칼을 꺼내 거꾸로 쥐고 손잡이로 날개끝을 내리찍었다. 잠시 동안 악마는 날개끝이 아닌 자신의 손등을 내리친 것이 아닌가 착각했다. 얼마나 안 아팠는지 알 만 하네요. 등줄기와 어깨까지 치인 듯한 둔통이 휩쓸고 지나가 악마는 맺힌 눈물을 떨궈내며 중얼거렸다. 망설임없이 힘대로 내리친 곳은 다행히도 하고 싶었던 것을 할 만큼은 부서져 있었다. 천사의 날개를 받았으니 악마의 날개로 갚아 주는 것이, 아니 이것은 평범한 악마의 기브 앤 테이크라기보다는, 연인이 제 몸의 일부를 주었으니 자신도 연인에게 자기의 일부를 가지고 다니게 하고 싶었다. 날카롭게 조각난 파편 몇 개를 손에 꾹 쥐었다 놓자 스퀘어 컷 모양으로 된 작은 유리 덩어리 두 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악마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작은 상자에 담았다. 아침이 되면 비서를 시켜 가능한 한 빨리 해 주겠다는 브랜드에 맡겨 귀걸이로 만들어 오라고 할 것이다. 철조망 철사로 된 반지와 유리 파편으로 된 귀걸이라니 말만 들으면 누추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지만 어떠랴. 악마는 거친 작업에 흠이 날까 빼두었던 반지를 다시 왼손 약지에 끼었다. 누군가가 격이 맞지 않는 그 초라한 쇠반지의 연고를 물으면, 연인이 직접 만들어 준 반지라 자랑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sad
카지노 일을 정리하고 언제 발발할 지 모르는 성전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뉴욕에 와 천사의 집에 들어왔다. 미합중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반열에 드는 수준은 아니라 해도 자신은 돈이 많은데, 그 집의 방 하나쯤은 채울 만한 금이 있건만 천사의 집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천사는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악마는 조금 의기소침해진다. 작은 주택에서 연인과 좀더 가깝게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천사는 자신보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집에 온다. 바쁘고 열정적으로 사는 것을 즐겨 바뀐 생활은 달리 어렵지 않아도 기껏 동거를 시작한 연인을 하루의 반의 반절도 못 보는 것도 아쉽다. 일은 어렵지 않아? 저녁을 준비하는 천사의 등을 껴안는다. 네. 할 만해요. 재미있어요. 사실 재미있지는 않다. 아무런 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우울감에 빠져 버리니, 심신이 적당히 지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괜찮을 뿐이다. 천사는 다행이라며 그저 웃고 넘긴다. 악마는 괜한 심술이 나 천사의 어깨를 앙 물었다. 좋아하니까, 뭐라도 해주게 해 줬으면.